북한이야기

우리는 북한에서 태어난것을 저주해요! (2회)

M 보리보리 0 748 2016.04.21 01:22

우리는 북한에서 태어난것을 저주해요! (2회)


-외할머니 옆에 어머니를 묻다


다음날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에 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무엇을 의논하고 있다. 내가 가서 들어 보니 엄마를 내갈 관이 없다는 것이다. 온 마을을 다 뒤져도 관이 없고 우리 집에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아빠가 있던 직장에 찾아가 棺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 직장장은 우리 집에 직접 와보고는 판자들을 모아 겨우 허술하고 작은 관 하나를 만들었다. 그날 오후 사람들은 엄마를 관에 안장하였다.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설움이 북받쳐 엄마의 시체에 다가가 울었다.


어느새 엄마는 관 속으로 들어갔고 관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은 엄마를 소 달구지에다 싣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는 산에 가서 엄마를 그 곁에 조용하고 편히 잠들도록 묻어주고 물고랑도 파주었다. 이렇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죽은 후 집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다. 밥은 탄광 노동자 합숙에서 먹곤 하였다. 아침이면 집을 나서 합숙으로 밥 먹으러 가곤 하였다. 점심, 저녁도 합숙에서 먹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런데 저녁에 우리끼리 자자니 너무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래서 어느날은 불도 끄지 않고 온 밤을 지샐 때도 있었다. 합숙에서 주는 것은 물과 옥수수를 섞은 밥, 풀죽, 감자 삶은 것, 또 옥수수 국수 등인 데 옥수수 국수는 너무 부풀어 대단히 굵으며 먹을 때면 막 메스꺼울 정도 였다.


그래도 우리에게 이만큼이라도 차려지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합숙에서 먹으면 늘 배가 고팠다. 그저 조금씩 주나마나 하는데 이것을 먹고 한 시간도 못 가서 또 배가 고프다. 나는 이때 인민학교 3학년을 다녔고 소연이 는 1학년을 다녔다. 나와 소연이는 배고프다 보니 어느 땐 학교에 가고 어느 땐 가지 않고 하였다.


배고프고 돈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저 장마당의 먹을 것들이나 구경하고 먹고 싶어하며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소연이는 먹을 것들을 볼 때마다 먹고 싶어 군침을 삼키곤 했고 어떨 땐 침까지 흘렸다.


그래서 한 번은 이런 소연이가 불쌍해서 아줌마한테 『그 빵 절반만 좀 주세요』라고 빌었더니 그 아줌마는 눈을 부라리며 『가라, 가라, 가라, 안 된다. 어디 너희들을 줄 것이 다 있겠니?』라고 말하며 못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빌어봤으나 욕이나 먹을 뿐 헛수고였다.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동정만 해 줄 뿐 우리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밥 한끼 먹여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자기들도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먹여 주겠는가.


이 중에서도 나를 동정해 주고 불쌍히 여겨주는 옆집 아저씨가 있었다. 이 아저씨는 나이가 많으셨는데 우리에게 잘 해 주셨다. 어느날 이 아저씨가 우리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철이야, 너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계신다 던데 그 곳에 가서 살지 않겠냐?』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데 연락을 못하잖아요. 가면 좋은데…』라고 대답하자 그 아저씨가 『그럼 한번 전보를 쳐보자. 그러면 연락할 수 있잖니?』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자고 하고 친할머니에게 전보를 쳤다.


그런데 전보를 치고 한 달을 기다려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또 한 장을 쳤다. 그런데도 종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한 장 더 쳐 보기로 하고 한 번 더 쳤다.


-집은 국가 집이기 때문에 국가에 바쳐야 한다』


친할머니에게 세 번째 전보를 친 다음날 아빠가 다니던 직장 사람이 우리집에 왔다. 내가 왜 왔느냐고 물으니 집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내가 『집이 어째서요』 물으니 『너희 집을 내놓아야 한다. 이 집은 국가 집이기 때문에 국가에 바쳐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안 돼요. 이 집은… 이 집을 내 주면 우리는 어디 가랍니까 ? 제발 이 집은 다치지 말아 줘요』 하고 간구하자 그 아저씨가 말하기를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郡黨(군당)에서 지시하는 바람에 지금 집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기 때문에 나는 『그럼 아저씨, 제가 할머니한테 전보를 쳤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려갈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이 집이 없으면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라고 애타게 말하자 아저씨는 할 수 없는지 『그럼 내가 한 번 말해보겠다』라고 대답하고는 집에서 나갔다.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부터 나는 더 무서웠고 두려웠다. 사태가 이런데 할 머니에게 보낸 전보는 무소식이니 대단히 안타까웠다. 그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에도 집 때문에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도 기다리던 할머니가 우리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전에도 우리집에 왔다 간 적이 있다. 우리가 집에서 누워 있는데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집 때문에 온 사람일 거라고 생 각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집 때문에 온 사람이 아니라 할머니였다. 나는 너무 기다리고 또 뜻밖이어서 할머니를 보자마자 할머니 한테 안겼다. 한동안 슬프게 울었다. 전보를 세 번 보내고 또 석 달이 지나도록 기다렸던 할머니었다.


-『할머니하고 같이 가서 살자』


할머니는 나와 소연이를 앉혀놓으시고 집안을 둘러보시더니, 『네가 전보에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썼는데 이것이 정말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대답하고 엄마가 사망한 경과를 할머니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울면서 듣던 할머니는 내 말이 다 끝나자 장판을 주먹 으로 치며 통곡하였다. 『야, 에미야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하며 몇 시간 동안이나 우셨다.


할머니가 집에 온 다음날 소연이와 나는 할머니와 같이 엄마를 묻은 산으로 음식을 가지고 올라갔다. 가서 먼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엄마에게 갔다. 할머니는 엄마 묘지로 다가가 푹 주저앉으며 또다시 통곡했다.


『이 에미야, 어째 이렇게 빨리 가는 거냐. 그럼 이 불쌍한 아이들은 어떡하구. 아! 어쩌다 이렇게 됐냐,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온 산에 울려퍼졌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가 얘네를 데려갈 테니 에미는 안심하고 있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절을 한 뒤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할머니는 집에 와서 우리에게 『할머니하고 같이 가서 살자. 너희들끼리 여기서 어떻게 살겠냐. 며칠 있다가 떠나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좋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특별히 사랑하는 엄마를 두고 가자니 슬프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가야만 살 수 있었다. 할머니가 온 다음에도 집 때문에 사람이 왔었다. 그 아저씨는 할머니와 집을 언제 비울 것인가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짐을 다 싸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그동안 엄마와 함께 지냈던 정든 집을 나섰다. 이 집은 참으로 뜻이 깊은 집이었다. 엄마와 함께 고난을 극복해 나가던 일들이 서서히 떠올랐고 엄마가 사망하던 일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대단히 아쉬웠다. 그래서 가는 길에도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남몰래 떠나니 바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가던 길에 한 번 더 엄마를 보려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산을 내려와 고원역으로 향하였다. 이때가 엄마와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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