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야기

북한의 강제 납치와 나의 북한 생활-1회

M 보리보리 0 1,032 2016.04.21 01:13

북한의 강제 납치와 나의 북한 생활-1회


◇ 북한의 강제 납치와 나의 북한 생활

* 이 글은 2001년 2월23일 북한인권시민연합 2001년도 전기총회에서 행한 이재근씨의 증언 녹취록이다.

나는 배우지도 못했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내가 납북된 경위와 북한 인권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겠다.


납북 당할 당시 내가 탔던 배는 원양에 가서 작업하는 저예망어선이었다. 출항한 날짜는 1970년 4월 10일이었다. 인천항을 출항해서 남진항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때 산둥반도 부근에서 작업하던 저예망어선에서 그 쪽이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무전이 왔다. 그래서 선장이 우리에게 말하길, "기왕에 고기 잡는 거, 좌우간 거기 가서 고기를 잡아서 연천에 갔다가 인천에 가자"고 했다. 그래서 산둥반도로 갔다. 가서 작업을 하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 주로 농어라든가 홍어 이런 값진 어종들이 많이 잡히기 때문에 15일 간을 작업했다. 그곳에서 몇 천 상자를 잡아놓고 이제는 백령도 쪽으로 나아가는 데, 거기서 동남쪽으로 그물을 끌고 나아가기 때문에 한 열흘을 끄니까 결국은 등대가 보였다. 거기서 한 며칠 간 작업을 하는데 우리 해군함대 1110호가 "왜 여기서 작업하는가?"라고 물어, "휴전선에서도 먼 데 작업하면 안 되는가?"라고 응했다. "여긴 위험하니까 좀 더 남쪽에 내려가서 작업하라." 그러면서 우리보고 하는 소리가 "고기 있으면 달라."고 해서 거기서 고기를 다섯 상자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배와 헤어져서 계속해서 작업했다.


4월 28일 저녁, 작업을 했는데, 백령도와 연평도 부근 중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물을 끌고 내려가는데, 그게 동남쪽이었다. 우리는 주선이 아니라 종선이었다. 그물을 놓고 동남쪽으로 끌고 내려가는데 그때 시간이 한 12시 40분쯤 되었었다. 한참 끌고 가고 있을 때 나는 침대에 있었다. 침대가 바로 선장 침대 밑에 있었는데, 그 때 예감이 좀 이상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잠도 안 오고 해서 누워있었는데, 잠이 들려고 할 때쯤 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일어나 고개를 내미는데, 해군 열 명 가량이 총을 들고 우리 배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 해군들이 혹시나 어뢰선 가까이서 작업한다고 단속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총을 장전하더니 다 내려오라고 공포탄을 쏘면서 말하자 우리는 할 수 없이 위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또 올라오더니 "이놈의 새끼들 서 있어"고 하면서 한 서너 발 쏘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 내려갔다. 아래층 갑판실에 가는 데, 배가 그물 찬 채로 그 경비정 두 대에 의해 끌려가는데 그물이 무거우니까 배 속도가 안나오게 되자, 다시 돌아와서는 "어떤 놈 새끼가 저항하고있어? "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없다."고 하니까 "이놈의 새끼가 또 거짓말한다"고 막 총을 쏘면서 우리를 몰고 가서 다 선실에 밀어 넣었다. 선실 뒤로 들어가자 밖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그물의 쇠줄을 끊고 배를 끌었다. 그 때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거기서 승리도 섬까지 가는데 한 시간 미만이 걸렸다. 약 삼십 노트 정도 속도로 달렸다. 우리가 다 도착할 무렵에 한국 해군함대에서 불법행위라고 방송하면서 행동을 취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북한에 끌려간 후, 우리는 이불이나 보따리 등을 다 싸서 한 쪽에 놓고, 이름표 써오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하선하였다. 가는 길에 트랙터 몇 대가 밭을 가는데, "저게 뭐 하는가"라고 물으니까, "우리 공화국에서는 저렇게 기계화되어 가지고 농민들이 편안히 앉아서 농사짓는다"면서 선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저들이 또 선전을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우리가 가는 길에 인민학교 학생들이 학교 앞에 쭉 줄을 서서 막 인공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주에 도착했다. 해주에 도착해서는 아무데도 안 가고 바로 해주 목욕탕에 갔다. 가더니 옷을 다 벗으라고 해서, 다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니까 시계하고 반지를 다 벗으라고 했다. 벗고 들어가는데, 우리가 그 때(1970년) 우리 옷 입은 것이 남한에서는 제일 못 사는 축인데, 구두를 신고 잠바를 입고 내려가니까 우리가 외국에서 왔는가 싶어서 사람들이 인사도 하고 그랬다. 그 때 보니 북한사람들의 옷이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빨아 입었지만, 완전하게 형식도 낙후한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목욕을 다하고 "시계하고 반지를 왜 안 주냐?" 그러니까 "이런 건 앞으로 다 갈 때 주겠다"하면서 그냥 있었다. 그런데 해주 여관에 가서 다른 건 몰라도 반지는 회수하고 시계는 주자는 생각으로 시계를 주었다. 시계를 받아 끼고 그 후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보통 5시간 10시간 계속되었다. 질문은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누구를 봤는가, 누구를 만났는가, 바다에서 어느 쪽으로 우회했는가" 등 세세하게 코스까지 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이들은 우리를 모두 싣고 해주 보위부로 갔다. 해주 보위부에 도착하자, 그곳 본부장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당신네 배는 분명히 간첩선이다. 바다에서 해군 함대를 만났고 거기서 지령을 받았고, 인천에서 나올 때도 지령을 받아서 나왔기 때문에 간첩행위를 했다. 그래서 배하고 사람하고는 공화국 법에 따라서 처리하겠으니까 후회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싱거워서 저 사람이 정신 있는 사람인가. 우리같이 고기 잡는 사람이 무슨 간첩행위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들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 일을 그렇게 짰던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지난 다음에 평양으로 올라 왔는데, 평양에 도착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는 선장에게 간첩행위를 했다고 마이크 앞에 가서 한번만 얘기하라며 계속 얘기를 했다. 그런데 선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선장이 그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간첩행위 한적도 없다. 지령을 받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당신네들 자꾸 간첩행위라고 이야기하는가?" 라고 이야기했다. 선장이 끝내 말을 듣지 않으니깐, 얼렀다가 술을 먹였다가, 여자도 붙여봤다가 그랬다. 하지만 김영욱이라는 그 선장이 말을 듣지 않자 북에서 포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 때 선장이 넘어가서 간첩행위를 했다고 인정했다면 배고 사람이고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머리가 좀 잘 돌고 힘도 좋고 건강한 사람들은 7명을 뽑았다. 이 7명중에 내가 포함되어 북한에 남아서 30년 동안 살다가 98년도에 탈북했다.


무엇보다도 북에서는 한국에서 간 사람들을 너무 차별대우를 했다. 우리 아들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다.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 했다. 그래서 정무원시험에서 세 번이나 일등을 했다. 한번만 정무원시험에서 일등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우리집 아들에게 어디를 가겠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그 전에 배탔으니까 나도 배타고 세계를 좀 돌아다니고 세상물정을 좀 알겠다고 하면서 해운대학을 가겠다고 하기에 나진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안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가서 왜 안되는지 알아보고자 계란이나 중국 담배 등을 사들고 찾아갔다. "왜 무엇 때문에 안되는지 이유나 좀 압시다." 라고 하자, "당원이라고 해서 다 되는 것 아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도 당원이지 내가 당원이기 때문에 하는 말 아닌가. 내가 북에 와서 입당하기 위해 힘들여서 일하는 게 다 내 아들 하나 대학 보내서 잘되자고 하는 건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게 아니다. 당신은 한국에서 왔지?" "그렇다." "그럼 아들 어머니는 어디에서 왔는가?" "중국에서 왔다" 하니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원래 대상이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보니깐 그 대학에 가는 사람들은 전부 중앙당 정치위원들, 부장들 과장들,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이었다. 잘사는 집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집 아들은 공부를 좀 못해도 받는데, 나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은 그런 대학에 갈 생각을 못한다. 대학직원은 굳이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한다면 자기가 하나 추천해주겠다며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광산 대학을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해운대학이 더 수준이 높은가?" 라고 물으니, 규정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은 해운대학에 보낼 수 없었다.


집에 와서 아들을 불러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그런소리 하지 마시오. 아버지의 처지가 그래서 내가 해운대학에 가지 못하는데, 내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1등으로 졸업한들 내 앞날은 뻔한 게 아닙니까 차라리 아버지 공장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을 대학으로 못 보냈다.


북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은 능력대로 공부하고 일하고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북한 사람들은 쇼를 잘 꾸민다. 납치되었을 때 간첩행위를 했다고 말하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만일 선장이 그 권유를 받아들였더라면 결국에는 정말 그렇게 한 것으로 사실화되었을 것이다.


우리와는 달리 동진호의 경우에는 선장인 최강석이 TV 방송에서 자신들의 배가 간첩행위를 하기 위해 북으로 들어왔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 때 나는 방송을 보며 저 사람들 미쳤다고 했는데, 그 후에 동진호 선원들은 한사람도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그런 것을 보면 쇼를 부려서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나 배를 빼앗고,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자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우선 마음 편하게 살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직장에 배치된 그 날부터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선 나를 전담해서 감시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작업반에도 있고, 그 다음 군은 군대로 있고, 보위부는 보위부대로 있고 안전부는 안전부대로 나와있고,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총 6-7명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녔다. 변소에 가도 따라왔다. 어떤 경우에는 집 주위에 텃밭에 강냉이를 심어놓았는데, 와사삭 소리가 나서 그곳에 뭐가 있는가 가만히 가보면 보위부 사람들이 숨어서 내가 어디로 가는가 무슨 얘기를 하는가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이처럼 남과 북의 생활이 차이가 있는데, 지금 내가 옛날 이야기처럼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그 때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차별대우를 받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좀 잘살았다거나 논이 많아서 지주라거나 앞장서서 사람들을 선동한 사람들도 그랬다.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은 천대받고 산다. 지금도 대학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한다. 북한에서는 그 사람들은 감시 받고 산다. 주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면 데모를 하면 데모한 학생만 붙들어 가면 되는데 북에서 만약 데모를 했다면 그 학생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잡아서 정치법 수용소에 보내게 된다. 그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잘못했으면 그 사람만 잡아서 보내면 되는데 조그만 애들까지 다 잡아서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니 이건 정말 눈뜨고 못 볼 짓이다.


내가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다. 국군포로였는데, 충청도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해방전사라고 했다. 해방 전사라는 게 바로 국군들 포로로 있다가 석방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하루 저녁에 자취를 감추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옛날에 잘살았다고 자랑을 좀 했는데 그게 어떻게 해서 보위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날 도시락을 싸서 일나가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짚차에 싣고 데려갔다. 그 후로 그 사람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나머지 가족들도 그 이튿날 어디로 실어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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